In mazes like this, hints don’t exist on the first question. However, that was always the hint.
Having no hint is the hint
파도타기🥕🐰☘️🥧❤️🐰🍀
비와 다정
DATE 202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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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강의실 창밖으로 사정없이 퍼붓는 비를 보며 윤라온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침엔 분명 쨍쨍했는데, 이게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가방 안에는 전공 서적과 노트북만이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작은 접이식 우산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보지않던 습관의 결과였다.

"어쩌지…."

강의가 끝나고 건물 입구에 섰지만,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몇몇 학생들은 우산을 펼쳐 들거나, 가방을 머리 위로 이고 뛰쳐나가고 있었다. 저 비를 뚫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건 거의 수영과 맞먹는 일이 될 터였다. 라온은 가방을 고쳐 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맞고 뛸까, 아니면 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까.

그때였다. 익숙하면서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빗줄기를 가르며 스르륵, 라온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짙은 회색 우산을 펼쳐 든 남자가 내렸다. 헐렁한 셔츠에 면바지, 평소 사무실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인, 이든이었다.

"…사장님?!"

라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시간에, 이 장소에 이든이라니.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이든은 태연한 얼굴로 라온을 향해 한 손을 까딱, 흔들어 보였다. 빗소리마저 잠시 잊게 할 만큼 의외의 등장이었다.

"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라온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이든은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 근처에서 의뢰가 하나 있었거든. 근데 뭐, 금방 끝나더라고. 근데 마침 비가 이렇게 쏟아지길래, 문득 우리 윤라온 씨 생각이 딱 나지 않겠어?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진짜 우산 없네, 너?"

그는 마치 자신이 예언이라도 적중시킨 마법사라도 된 양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한 걸음 다가와 라온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봤냐? 사장님이 이 정도야. 거의 뭐, 독심술사 수준 아니냐?"

빗방울이 투둑거리며 우산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라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하여튼, 이 남자. 사람 속마음 꿰뚫어보는 데는 선수라니까.

"으이구…."

라온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일 해도 칭찬이 아주 그냥 쏙 들어가네요, 사장님은."

그러면서도 라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든의 우산 속으로 한 걸음 쏙 들어섰다. 이든의 팔뚝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좁은 공간 안으로 훅 끼쳐오는 그의 체취와 빗냄새가 섞여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뭐?!!"

이든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에는 '내가 이만큼이나 해줬는데 칭찬은 못 해줄망정!' 하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야, 라온아. 기껏 와줬더니 반응이 너무 인색한 거 아니냐?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아?"

툴툴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라온은 알 수 있었다. 이든은 늘 그랬다. 겉으로는 능글맞거나 틱틱거려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누구보다 속정 깊은 사람이었다. 라온은 그런 이든의 투덜거림에 대꾸하는 대신,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이든은 여전히 입으로는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라온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살짝, 우산을 그녀 쪽으로 더 기울이고 있었다. 덕분에 자신의 어깨 한쪽이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라온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서, 어디로 모실까요, 공주님?"

이든이 여전히 능글맞은 말투로 물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공주님은 무슨요. 그냥 버스 정류장까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버스 정류장? 이 몸이 직접 행차하셨는데 서비스가 너무 소박하잖아. 집까지 바래다주지, 뭐."

"됐거든요. 사장님 바쁘신 분이잖아요."

"오늘은 한가해. 특별히 윤라온 씨 전용 기사 해준다니까."

결국 라온은 이든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툭툭,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늑하게 들려왔다. 이든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차 안에는 어색한 듯 편안한 침묵이 감돌았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한참 만에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든은 운전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이제야 좀 제대로 된 인사가 나오네. 근데 뭐, 이 정도 가지고."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따뜻함은 숨길 수 없었다. 라온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빗속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끔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다정함이, 그 어떤 화려한 말보다 더 크게 마음을 울린다고. 그리고 어쩌면, 이 변덕스러운 봄비가 그리 싫지만은 않다고.

이든의 차는 빗속을 부드럽게 달려, 라온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몰랐지만, 라온의 마음은 젖은 운동화만큼 눅눅하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뽀송뽀송해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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